1492년 콜럼버스가 남미에 도착했을 때, 그의 탐험대원들이 처음으로 고구마를 맛본 유럽인이 되었다. 이들은 중미와 남미의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고구마 품종을 발견했으며,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고구마를 주로 ‘바타타(batata)’ 또는 ‘타이노(Taino)’라고 불렀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 단어를 차용해, 감자를 뜻하는 스페인어 ‘파파(papa)’와 케추아어를 결합하여 ‘파타타(patata)’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현재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푸에르토리코, 브라질, 도미니카 공화국에서는 고구마를 ‘바타타(batata)’라고 부른다. 한편, 멕시코, 볼리비아, 페루, 칠레, 중앙아메리카에서는 나우아틀어의 ‘카모틀리(camotli)’에서 유래된 ‘카모테(Camote)’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필리핀에서는 타갈로그어로 ‘카모테(Camote)’라고 부르는데, 이는 고구마가 멕시코에서 직접 전래된 것에서 기인한 것이다.
1605년, 류큐 왕국의 노쿠니 총관이 중국에서 고구마를 들여와 오키나와섬에 재배를 시작하면서 일본의 고구마 재배 역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류큐에서는 중국에서 전래되었다는 의미로 고구마를 ‘가라이모(からいも, 唐芋)’라고 불렀으며, 고구마는 곧 류큐 전역에서 주요 식량 자원으로 자리 잡았다. 노쿠니 총관이 사망한 후, 그의 공적을 기려 ‘고구마 태자’로 불리었고, 류큐 왕실은 그의 후손들에게 사무라이 신분을 부여했다.
1609년, 에도 막부가 류큐 왕국을 점령한 이후, 1615년에 쓰가와라는 인물이 오키나와섬에서 고구마를 가져와 사쓰마 번에 심기 시작했다. 혼슈 지역에서는 1731년부터 고구마 재배가 시작되었고, 1732년에 발생한 교호 대기근 동안 많은 사람들이 고구마를 먹으며 굶주림을 이겨냈다. 이 시기 후, 쓰시마섬에서는 고구마 덕분에 부모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는 이유로 고구마를 ‘효자 고구마’를 뜻하는 ‘고우시아사(こうしあさ, 孝子麻)’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후 고구마는 일본 전역에서 구황작물로 널리 퍼졌고,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사쓰마 지방에서 유래된 이름을 따 고구마를 ‘사쓰마이모(サツマイモ, 薩摩芋)’라고도 부른다.
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의 후원 아래, 마젤란 탐험대는 태평양을 건너 1521년에 필리핀에 도착했다. 탐험대는 다음 해 스페인으로 돌아가며 최초로 세계 일주를 완수했지만, 그 과정에서 마젤란은 필리핀 막탄섬에서 전투 중 사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스페인은 필리핀에 대한 관심을 키우게 되었고,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1564년에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원정대를 파견했다. 멕시코에 있던 레가스피가 원정대를 이끌고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 정복에 나섰으며, 1571년에 필리핀을 스페인의 식민지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고구마는 멕시코를 통해 아시아로 처음 전해졌다.
스페인의 필리핀 점령 이후, 마닐라는 중국과의 무역을 주도하는 핵심 도시로 성장했으며, 중국인들이 모여 사는 거류지가 형성될 만큼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졌습니다.이 무렵, 중국 푸젠성 출신인 진진룡이 필리핀의 루손섬에서 고구마 씨를 몰래 가져와 1594년에 중국으로 돌아가면서 중국에서 고구마 재배가 시작되었어요.고구마는 짧은 시간 안에 그 맛과 재배의 용이함 덕분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습니다.1608년에는 푸젠성에서 씨고구마를 가져와 재배법을 연구한 명나라의 서광계(1562~1633)가 《농정전서》[20]에 고구마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습니다.당시 고구마는 홍저(紅著), 첨저(甛著), 주저(朱著) 등으로 불렸으며, 외국에서 전래된 작물이라는 뜻으로 번저(番著)라고도 불렸습니다. 서광계는 고구마가 가장 훌륭한 구황작물이라고 칭하며 널리 재배할 것을 권장했습니다.
고구마의 기원은 주로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특히 멕시코와 콜롬비아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아메리카에서는 고구마가 최소 5,000년 전부터 재배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아메리카에서는 페루에서 발견된 고구마의 잔재가 기원전 8,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스텍, 마야, 잉카 문명에서 고구마는 주요 농작물로 재배되었으며, 다양한 품종이 개발되기도 했다. 이후 16세기 초 콜럼버스의 탐험을 통해 유럽으로 전해지면서 대항해 시대의 산물로 자리 잡았다. 이른바 '콜럼버스의 교환'으로 알려진 이 과정에서 신대륙의 작물이 구대륙으로 유입된 것이다. 이후 16세기 후반에는 스페인을 통해 아시아로 전파되었고, 점차 전 세계에 보급되어 감자와 옥수수와 함께 중요한 구황작물이 되었다.
고구마는 조선 초기 중국의 문헌인 본초강목에서 감저(甘藷)로 언급되었다. '고구마'라는 명칭은 일본어에서 음역된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마의 전래 기록은 조엄의 《해사일기》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1764년 6월 18일자의 일기에는 "작년에 고구마를 부산으로 보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한, 조엄이 1763년 조선 통신사로 일본에 체류하면서 작성한 해사일기에서는 ‘이름은 감저라 하며 孝子麻(효자마, こうしま)라고도 불리며, 일본어로는 고귀위마(高貴爲麻)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대마도의 방언을 나타내며, 현재 쓰시마 지역에서는 고구마를 고코이모(孝行芋, こうこいも)라고 부른다. 한글로는 유희의 《물명고》(1824년)에 고금아라고 기록되어 있다.
19세기 초 청나라에서 들어온 감자는 '북쪽에서 온 감저'라는 의미의 북감저(北甘藷)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감자와 고구마의 명칭이 서로 혼용되기 시작했다. 고구마는 감저(甘藷), 감서(甘薯), 남감저(南甘藷), 단감자, 참감자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김동인의 소설 《감자》(1925)에서는 ‘감자’라는 표현이 고구마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제주도에서는 고구마를 ‘감저’라 부르고, 감자는 ‘지슬’(地實, 지실)이라고 불린다. 전라도와 충청도 등 양호(兩湖) 지방에서는 고구마를 '무수감자'(무 감자)나 '진감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늘의 포스팅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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